[평론 당선작]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작품 감상 링크: https://blog.naver.com/smuhakbo/222592443025 영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예술이며 산물이다.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그리고 방식, 그곳에서 지켜져야 할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상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물론 영화를 보고 그것을 개인화 시키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더 나은 삶의 필요성을 담지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하나의 문화예술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혐오”, “무관심”, “언택트” “개인주의” 이 단어들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현주소다. 코로나로 가속화된 언택트 사회 속 우리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은 타인의 관계로부터 정의되는 사회적 동물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한 객체로서 살아가지만, 유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이 확장되어 공통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는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가 이루어진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속에 너무도 흔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며 나의 가족의 이야기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그걸 왜 알아야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묻고 싶다. 이것이 너, 혹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이라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와 지켜져야 할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목수 일을 하며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속에서 그는 ‘댄’이라고 불려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인이자 할아버지인 그는 목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집 앞 마당에 개똥을 치우지 않는 이웃에게 잔소리도 하고 항상 시끄럽게 떠드는 이웃에게 주의를 주기도 한다. 다니엘은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며 한 인간이다. 다니엘 뿐 만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특별히 영웅적인 인물로 설정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다. 영화의 제목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인 것처럼 영화는 꾸준히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 자신을 강조하고 드러낸다. 이는 다니엘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구인정보기관을 걷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직 상담을 받기 위해 센터에 찾은 다니엘의 모습은 북적이는 센터 사람들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고 이것은 영화의 제목에서 강조하는 ‘나’가 다니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영화는 다니엘이 평소에 앓던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그의 일상에 균열이 생김을 알리며 시작된다. 의사는 다니엘에게 일을 잠시 쉬고 휴식을 취해야한다고 말한다. 건강 악화에 따라 당장은 일을 쉬어야하는 다니엘은 쉬는 동안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국가는 그에게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며 질병수당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한다. 다니엘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마냥 받아들일 수 없다. 질병수당을 받지 못하면 그는 당장 추위와 굶주림에 잠식되기 때문이다. 그는 결과에 항고하기 위해 관공서에 전화를 걸지만 길고 긴 관공서의 구린 전화 대기음 끝에 들려오는 말은 정식 통보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뿐이다. 하지만 다니엘에게 당장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에 그는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관공서에 찾아간 그는 또 한번의 좌절을 맞이한다. 모든 신청은 인터넷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관공서 직원은 말한다. 영화는 다니엘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제동을 거는 허울뿐인 제도와, 규칙들을 끝없이 나열한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는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 어느새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아버리는 기계의 발전이다. 문명의 발달과 혁신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그저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되며 주류에서 밀려나 도태된다. 조금 더 편리하고 나은 세상을 위해 개발되는 기계, 서비스는 오히려 최하류층을 양산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용한다. 이는 관공서에서 실업급여 신청을 인터넷으로만 해야 하는 줄 알았지만 종이로 뽑아 신청할 수도 있었다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어두운 화면 속 기계적으로 다니엘에게 건강상태를 묻는 담당자의 태도와 목소리는 다니엘을 궁지에 몰아넣는 기계와 혁신을 상징화 하는 부분이다. 심장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온 다니엘에게 의료진은 심장과는 전혀 관계없는 손, 발가락, 팔에 대한 상태만 묻고 심장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다니엘의 말은 묵살한 채 그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일관적이며, 인간적 감정조차도 배제되어 보이는 의료진에 태도에 다니엘은 “심장과는 점점 멀어진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이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신체적인 단어를 넘어 마음이라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제도, 기계를 상징화 하는 의무적인 태도의 의료진은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니엘과 케이티가 나누는 연대, 즉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기계적이고 차갑게 변해버린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감정일 뿐인 것 이다. 영화에서 다니엘은 딜런에게 “코코넛과 상어 중에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건?” 이라는 질문을 한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딜런은 코코넛이라고 대답하고 다니엘은 정답이라 말한다. 딜런과 다니엘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퀴즈는 달콤하고 따뜻한 봄날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던 복지제도가 그것에 의지하는 수많은 케이티, 다니엘을 궁지에 몰아넣고 죽어가게 만드는 주범임을 상징한다. 관공서에 다니엘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다니엘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 속 관공서는 소외된 계층으로 가득 차 있고 이들 모두는 다니엘과 케이티처럼 국가가 만들어 놓은 한낱 작은 제도에 의지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수많은 다니엘과 케이티를 위해 만들어진 달콤한 코코넛들은 오히려 상어처럼 눈에 보이는 위협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그들의 삶 주변부에만 자리할 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찬양되는 디지털시대는 늘어난 수명과 함께 고령사회에 접어든 사회의 흐름은 간과한 채 세대 간 소통의 부재를 가속화 시킨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견고히 하며 사적, 공적 복지를 약화시킨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시대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며,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새로운 것은 누군가의 현재를 위협하기도, 좌절시키기도 한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에 가로막힌 다니엘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누군가에게나 평등하고 공평하게 적용되어야할 법의 부재이다. 영화는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관공서 직원들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의 표상을 취하지만 정작 도움을 받아야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차갑고 냉정하기만 하다. 관공서 직원 중에 유일하게 다니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친절한 직원은 규칙에 어긋난 서비스라며 핀잔을 받는다. 결국 다니엘의 인터넷 신청을 도와주는 건 또 한명의 약자인 흑인 청년뿐이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의 문제는 내부에서 표출되어 해결되지 못하고 그들의 문제로만 남게 된다. 이는 영화 종반부 다니엘이 실업 급여를 포기하고 관공서에서 나와 벽에 페인트로 영국 사회에 내던지는 경고의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린 통화음을 바꾸고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원한다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응원을 하는 건 소외받는 계층이며, 흑인, 수많은 다니엘들 뿐 이다. 영화에서는 특정한 악인이나 주인공의 적대자는 등장하지 않지만 관객은 다니엘의 답답한 상황에 분노를 슬픔을 느낀다. 이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조차 모르겠는 근본적인 원인의 부재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안타고니스트로 작용하는 것은 거대한 사회, 국가이며 이들로 인해 당연한 권리를 제공받아야 할 주인공들의 목표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고 아프면 질병 수당을 받으면 되는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권리는 그들에게는 쟁취해야할 목표로 자리 잡는다. 주인공들의 안타고니스트는 빠르고 효율적인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관공서 직원들로 상징화 된다. 그들은 그저 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만 존재하며 표면적으로만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하수인들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에 좌절하는 다니엘에게 관공서 직원들은 앵무새처럼 사무적인 안내만 반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니엘은 케이티를 만난다. 케이티는 다니엘과 같이 실업급여를 받는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상담시간에 단지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지원금은 삭감되고 만다. 다니엘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분노하고 사람들 또한 케이티의 실수를 괜찮다며 넘어가주지만 로봇 같은 관공서 직원에게 인간적 관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복지국가의 모순에 대해 질문한다. 그들이 말하는 복지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것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영화 속 모순은 비단 영국 한 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개선되었지만 2019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장애등급제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이는 국가가 정해놓은 일률적인 기준에 따라 장애정도를1~6등급 까지 정해놓고 등급을 매기는 제도이다. 등급에 따라 지원되는 지원금의 정도, 활동보조를 지원받을 수 있는 시간의 차이가 있기에 장애등급제는 장애인들에게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장애등급제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장애인 개개인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2021년 현재 폐지되었지만 활동보조 축소, 실질적인 장애인의 처우 개선은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여전히 장애인들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그들의 생사는 공공기관이 정한 서류 한 장에 결정 될 뿐이다. 이는 영화 속 다니엘의 생사가 관공서에서 보내진 종이 한 장에 결정되는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할 다니엘과 케이티는 그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벼랑 끝에 몰린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서로가 나누는 작은 연대이다. 그들이 나누는 연대는 최소한의 인간적 나눔이며 위로이다. 다니엘은 그들의 허름한 집을 고쳐주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찬 집 창문에 비닐을 붙이는 방법을 알려주며 그곳에 온기를 채워나간다. 그렇게 케이티와 다니엘은 어느새 친구가 되고 차가운 현실 속 따뜻한 감정을 나누며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을 보여준다. 케이티를 향한 다니엘의 위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는 식료품점에서 굶주림을 못 참고 통조림을 까먹는 그녀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살기 위해 성매매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발견하고 나서도 그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작은 연대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잔인한 현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케이티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살고자 발버둥 치고 이러한 케이티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욕구는 낡아빠진 집을 계속해서 청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케이티는 더러운 화장실 벽을 벅벅 문지르며 닦아내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된 타일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리고 만다. 화면 전경에 배치된 두 개의 벽 사이로 주저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찌그러진 깡통의 모습을 형상화 한다. 살아가야하기에, 살고 싶기에 행해지는 그녀의 여린 날개짓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현실은 그녀의 삶을 더욱 잘게 조각낼 뿐이다. 케이티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이력서를 돌리고 청소 일을 하지만 일자리는 여전히 부족하다. 영화 초반부 다니엘의 호의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의 눈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빛을 잃어간다. 마치 점점 벼랑 끝에 몰리는 그녀의 생활을 대변하듯 말이다. 영화 속 케이티가 위생 용품을 훔치는 장면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존재하는 영국 사회에서 낯설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존재하는 사회복지제도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2016년 5월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과 휴지를 사용하는 일명 “깔창 생리대 이슈”는 영화 속 케이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는 불과 5년 전의 일이다. 영화는 영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관객은 왜인지 다니엘과 케이티가 살아가는 사회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영화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한 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어쩌면 현재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케이티는 식품 지원소 구석에서 뭔가에 홀린 듯 통조림 뚜껑을 따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케이티를 본 안내 직원은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고 케이티는 너무 배가 고팠다며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케이티의 눈물 어린 호소를 비웃기라도 하듯 살기 위해 성매매까지 감행하게 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훼손은 존재자체의 위협과 다름없다. 이러한 위협은 다니엘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질병 수당을 기각 당한 다니엘은 실업 급여라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처지에 놓여있지만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노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를 관공서에 제출해야 한다. 살기위해 자신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임을 증명해야하는 절차는 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짓밟는다. 결국 그는 허울뿐인 자기소개 작성 특강을 듣고, 자신이 평생을 쌓아왔던 목수 경력을 들어 이력서를 돌린다. 하지만 다니엘의 몸은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의사 또한 그에게 쉬어야한다고 말한다. 결국 일을 하지 못한 그는 관공서에 자신이 들은 자기소개서 특강 이력과 취업을 위해 노력한 증거를 제출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며 실업 급여대상이 안된다고 말하고 다니엘의 자기소개서가 특강에서 안내된 양식처럼 기재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제재 대상이 된다. 이는 사실상 다니엘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관공서는 다니엘에게 선택을 하라고 강요하지만 그에게 선택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정해진 규칙을 강요받을 뿐이다. 아파서 일을 못하지만 그 고통과 상태의 정도를 증명해야지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그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 결국 그는 언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질병 수당 결과에 항고를 하기로 결정한다. 영화의 창작자인 켄 로치 감독은 복지국가의 이상인 영국의 구조적인 모순과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영화 속 사회는 복지 국가의 주체만 존재할 뿐 대상은 부유한 채 고정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뿐이다. 이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한순간에 삶의 방향을 잃은 우리사회의 소시민의 모습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어쩌면 약자를 위한 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법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기에는 너무도 허접하며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존엄성과 권리를 박탈당한 인물들은 케이티와 다니엘뿐만 아니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식료품 지원소의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 과 거리에 부유하는 노숙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감독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는 어떠한 감정의 호소에도 의지하지 않는 객관적인 카메라 워킹에도 드러난다. 다니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질병 수당 항고 날 그는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결국 항고 일에 전하고자 했던 그의 말은 케이티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카메라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미동 없는 다니엘의 모습을 케이티와 관계자 사람들의 어깨너머 풀숏으로만 보여준다. 영화의 종반부 다니엘의 장례식에서 그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아닙니다. 또한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니엘은 일을 할 수 없는 몸 상태였고 그렇기에 정당한 복지 혜택을 받아 건강을 되찾고 다시 그가 사랑하는 목수 일을 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가 누려야 할 삶의 권리를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들이 다니엘과 케이티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고 그로인해 다니엘은 모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기표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케이티는 삶의 밑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강했던 다니엘은 자신,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대변해 세상에 소리쳤고 함께 분노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견고하게 자리 잡은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삶은 붕괴됐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감독이 꼬집는 복지 구조의 모순,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기계와 문명의 혁신은 과거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가까이에 존재하는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다. 영화를 보는 누군가는 끝없이 항의하고 불평하고 질문하는 다니엘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영화에 귀기울여야하는 이유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온한 삶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남겨질 수많은 다니엘들이 자신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연대하고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감독은 말한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외쳐야 한다.”고. 황혜진(영화영상전공)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요? 영화를 전공하기 전까지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의문점을 가지는 것부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그런 제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써내려갔습니다. 제 작은 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다니엘들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쁘고 가슴 벅찬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사랑하시고 행복하세요!
[평론 가작] <무드 인디고> 속의 색채 분석
<무드 인디고> 속의 색채 분석 작품 감상 링크: https://blog.naver.com/smuhakbo/222592437743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작품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상을 통해 드러나는 색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영상미가 얼마나 뛰어나는가,이다.작품을 볼 때,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다 다르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색이 주는 시각적 효과,즉 영상미가 좋은 작품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내가 알고 있는 작품들 중 색을 표현하는 방법이 단순하지 않고,기발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색을 표현해 낸 작품이 있다. 바로,영화 <무드 인디고 (MoodIndigo)>(2014)이다.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되는 순간을 비비드 색,행복한 결혼 생활을 즐기는 순간을 파스텔 색,주인공이 병이 들어 지쳐가는 순간을 모노 색,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 비극으로 결말이 이어진 부분에서는 흑백으로 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이 영화 속의 색의 묘사는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나타나며,단순히 인물의 고유의 색을 부여한 작품과는 다르게 색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의 배경에 따라 변하는 색의 묘사와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 및 요소들을 색채와 연관 지어 분석해나가려고 한다.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 (MoodIndigo)>(2014)의 주된 이야기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이지만,이것이 결코 단순하게 풀어낸 것이 아닌 다른 영화와는 구분되는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랑의 색을 풀어낸다.칵테일을 제조하는 피아노를 발명해 부자가 된 콜랭은 우연히 클로에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고,결혼까지 하게 되지만,여자 주인공 클로에는 페에 수련이 피게 되는 불치병에 걸리고 만다.치료비를 벌기 위해서 남자주인공인 콜랭은 열심히 돈도 벌고,치료에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클로에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지만,클로에의 병이 재발하며,결국엔 클로에의 비극으로 영화가 점점 마무리 되어 간다.이 영화에서의 색의 표현은 단순히 인물에게 고유의 색을 지정한 것이 아닌 남자주인공 콜랭과 여자주인공 클로에의 사랑의 색을 묘사해 나타나고 있다.그렇기에 인물의 심리와 스토리에 따라 사랑의 색이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칵테일을 제조하는 피아노를 발명해 부자가 된 콜랭이 우연히 클로에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단계까지의 영화장면이 비비드한 톤(vivid tone)으로 표현된다.비비드는 「발랄한・밝은・선명한・눈부신・생생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색채에서의 비비드는 가장 채도가 높은 선명한 색을 말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등장한 주변 건물이나 소품들이 노란색,청록색,연두색,분홍색 등으로 채도가 높고 선명하여 밝은 느낌의 분위기를 전해준다.또한 클로에가 입은 옷의 색은 비비드한 컬러의 노란색은 명량,활발,환희 등의 의미가 와닿았고,편안하고 부드러우며,긍정적인 이미지가 돋보였다.콜랭은 명도가 높은 회색 컬러로 밝은 느낌과 점잖음,겸손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한다.전체적인 분위기나 느낌이 난색들의 계열로 따스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밝은 모습이 느껴졌다.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의 밝은 감정과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듯한 느낌을 영화 속에 잘 녹여내어 표현 한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콜랭과 클로에는 마침내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결혼을 하고,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는 단계를 파스텔 톤(pastel tone)으로 표현했다.파스텔은 파스텔로 그린 것처럼 부드럽고 옅은 색을 총칭하며,페일 톤이나 라이트 톤,라이트 그레이의 톤과 같은 고명도의 색조를 말한다.이 때의 배경은 비비드한 모습보다 채도가 옅어진 것을 볼 수가 있다.연한 보라색,연한 분홍,연한 주황,연한 연두 등 옅은 색들을 사용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또,고명도의 색조를 사용하고 있어 명도가 높을수록 가벼운 느낌을 주는 중량감 또한 느낄 수 있다.화면 전체의 톤은 비비드한 톤의 밝았던 분위기와는 다소 다르게 채도가 살짝 빠져 연한 느낌의 부드러움을 가져다주고,안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또한,콜랭과 클로에가 결혼하는 장면에서 입은 복장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였는데,웨딩드레스의 색은 흰색으로 청순,결백,신성,청정의 의미를 가져다줬고,턱시도의 색은 검정으로,기존의 부정적인 의미가 많은 검정과는 다르게 모던,고급 시크함,세련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콜랭과 클로에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세 번째로는,클로에의 페에 수련이 피게 되고,콜랭은 이런 클로에의 소식을 듣게 된다.콜랭은 클로에의 치료를 위해서 전 재산을 바치지만 이마저도 돈이 부족해져,일을 하고 만다 클로에의 투병 생활과 치료에 전념하는 콜랭의 모습들의 단계를 모노톤(mono tone)으로 보여주고 있다.모노톤은 전체 이미지의 톤의 형태가 단색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며,흑백을 이용하기도 하고, 하나의 단색으로 전체 톤을 구성할 수도 있다.주인공이 병이 들고 지쳐 힘겨워하는 장면들에서는 채도가 거의 없고,빛이 사라진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파랑,cyan,청의 한색계열의 색들은 어두움,쓸쓸함,서늘함,차가움 등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창문으로 수련이 들어오는 장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또한,수련이 폐에 들어와 얼어붙는 과정에서 흰색으로 서리가 가득 낀 장면은 온도감은 낮고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심장의 색은 짙은 빨간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가져다준다.배경이 모노 톤으로 깔린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조용하고,서늘한 온기들이 느껴지는 부분들인 것 같다.단색으로 한 층 정돈된 분위기를 느끼게 하여 클로에의 투병 생활이 얼마나 고되고,힘들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게 해 준 장면들이였다. 마지막으로는,클로에가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콜랭이 클로에의 장례를 치르는 모습까지를 흑백톤(colorless tone)으로 보여주고 있다.흑백은 색상이 대비되는 흑과 백의 두 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클로에의 죽음이 전체적인 블랙톤으로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검정색은 허무,절망,부정,암흑,죽음 등의 어두운 부정적 이미지를 가져다준다.이러한 색의 연상 언어들 중에서도 죽음,절망의 단어가 크게 와닿는다.클로에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겪고 있는 콜랭의 모습이 허무하고,절망적인 감정들 또한 느낄 수 있게 된다.또한 낮은 명도로 인해 강조되고,집중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콜랭과 클로에가 철도길 위에서 걸으며 백색의 깃털이 휘날리는 장면에서는 흑과 백의 명도 차이가 분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 흰색 깃털들이 밝고 진출된 느낌을 보여줬다.반면에 콜랭과 클로에의 옷과 주위의 배경은 채도가 거의 빠져 비극의 결말을 암시한 색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마냥 좋기만 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이 점점 잃어 흑백이 되어버린 결말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 (MoodIndigo)>(2014)에서 인물의 심리를 나타내는 색과 전체적인 배경의 색감, 인물의 의상 속 색의 의미, 색의 연상이나 색의 온도감, 색의 대비 등 영상 속에 담긴 아름다운 영상미를 다양한 시각으로 색채를 바라보고 분석해봤다. 사랑에 대한 환상의 색이 인물의 심리와 스토리에 따라 색이 변하고, 점점 색을 잃어가는 모습을 작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처음 남녀가 사랑에 빠져 사랑이 시작되는 단계를 비비드 컬러였다면, 마지막은 여주인공인 클로에의 죽음의 비극으로 색을 완전히 잃어버린 흑백 컬러까지 채도가 있고, 없고의 완연한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색상대비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색채를 가지고 인물의 심리나 성격, 색의 상징적 의미,대비효과 등을 볼 수 있으며,영화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은서(스마트정보통신학과) 영화 <무드인디고>를 보며 처음 영화 속 장면은 아름다운 색들로 가득했지만, 영화가 전개될 수록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장면들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도 스토리적으로나 색을 표현한 방식에 대해 계속 여운이 남기도 했고, 영화 속에 색을 이런 방식으로 녹여내고 담아낼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 영화를 색과 엮어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가작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평론 심사평]
정의진 교수(프랑스어권지역학전공) 이번 상명학술상 평론 부문에는 모두 3편의 응모작이 투고되었다. 예년과 비교해 투고 편수가 적은 듯 보여서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다. 평론은 글을 쓰는 사람의 독자적인, 나아가 창조적인 관점과 감수성을, 글의 내적인 논리 구성을 통해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능력은 학업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여러모로 필요한 능력이므로, 좀 더 많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면 한다. 올해의 당선작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평론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상황의 심화, 영국의 사회복지제도와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처지 사이의 괴리 등 영화의 핵심 문제의식을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과 대비시켜 분석하고자 한 관점의 진지함, 이러한 관점을 다른 투고작들에 비해 성실한 논지 전개로 풀어나간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줄거리에 대한 요약이 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서, 평론의 관점과 논점이 더 선명하게 부각 되도록 좀 더 압축적이고 정리된 논지가 전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작인 ‘<무드 인디고> 속의 색채 분석’은 미셸 공드리의 영화에서 활용된 다양한 색채들을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설득력 있게 분석하였다. 개별적인 분석들은 일정한 설득력이 있으나, 장면들의 편집을 통해 작품에 고유한 시간성을 구성하는 영화예술의 특수성을 고려한, 영화의 시간적 전개 과정과 색채의 변화 양상에 대한 좀 더 면밀하고 구체적인 분석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화 당선작] 겨울비
김예림(만화애니메이션학과) 혼자서 그려냈던 제 만화가 수상을 하고, 학보에 실려 제가 아닌 다른 학우들도 이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이번 수상이 저를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지금의 기쁜 마음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짧은 만화이지만 누군가가 학보를 통해 제 작품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울림을 받을 수 있었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만화 가작] 무력감
이지원(만화애니메이션학과) 4년간의 대학생활과 코로나 사회 속 느꼈던 감정들 중 ‘무력감’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기쁘네요.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만화 입선작] 출동! 해양 구조대
이지민(디지털만화영상학과) 카툰은 도전해 본 적 없는 장르라 걱정도 있었는데 이렇게 학술상에서 입상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류에 적절한 소재였기 때문에 좋게 봐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사 드리고 더 갈고닦아 좋은 작가가 되겠습니다. ‘출동! 해양 구조대’는 다들 알아보셨겠지만 무인도라는 소재에 코로나 사태를 접목시킨 카툰입니다. 한 컷으로 짧은 분량이지만 웃음을 드렸다면 대성공입니다. 하루빨리 마스크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만화 심사평]
고경일 교수(디지털만화영상전공) 겨울비라는 작품은 이야기의 구조나 연출도 좋지만 펜선에서 작가의 심상이 드러나는 우수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분량이 너무 작다 보니 이야기의 그릇이 작아진 것이 안타깝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잘 잡은 학생입니다. 무력감이라는 작품은 현대인들의 내면을 담아낸 수작입니다만 아직 만화의 칸 나누기, 면 나누기와 같은 연출이 다소 아쉽습니다. 짧은 스토리의 단편들을 가지고 더 많이 실험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조율한다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카툰 작품은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선과 내용을 다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노력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창의적이고 독특한 작품들이어서 심사 기간 동안 행복했습니다만 내년도 학술상 만화 공모작은 미리미리 준비해서 형식과 내용이 더욱 풍부한 작품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사진 당선작] 볕 드는
김민혁(경영학부) 사진 찍는 것을 취미로 가진 이래로 처음 받는 사진 관련 상이라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또한 제가 다니는 상명대학교에서 주최한 상명학술상에서 주시는 상이니만큼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이번 사진은 창경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맑은 하늘과 옛 고궁, 그리고 뒤의 가을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평온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진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제 사진을 보시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바래봅니다.
[사진 가작] Quietly
박영빈(사진영상콘텐츠학과)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피곤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여유가 있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항상 시간에 쫓기며 아등바등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쉬어갈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 사진을 보는 여러분의 마음이 평온한 바다, 하늘과 같길 소망합니다. 끝으로 학술상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입선작] 피어오름: 새로운 시작
이하영(행정학부) 새로운 시작이었던 대학교 1학년을 마치며, 저의 한 해를 돌아보며 찍은 사진이 선정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물은 많은 사람들이 잔잔하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튀어오르며 상쾌하고 시원한 이미지를 사진에 담아 우리의 새로운 시작에 빗대어 보았습니다. 비록 한 장의 사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사진이기을 바랍니다. 2021을 보내고 2022년을 바라보는 지금,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며 다 함께 피워오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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